망각에의 저항, 그리고 극복
히로시마 내사랑
엠마누엘 리바,오카다 에이지 / 알랭 레네
나의 점수 :

마그리트 뒤라스 각본, 알랭 레네 감독

프랑스 문학 시간과 영화사 시간에 인용으로만 접했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봤다.
그러니까 영화의 제목을 머릿속에 기억해둔 지 6~7년만에..

토요일의 서울아트시네마(구 허리우드 극장)은 매우 붐볐고,
여느 멀티플렉스 못지 않은 좌석점유율을 자랑했다.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누군가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미래는 밝다."고 친구에게 농담을 날렸다.

영화는 느베르의 소녀 '그녀'가
평화에 관한 영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도착한 후 이틀간의 일정을 담고 있다.
프랑스 여자가 일본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줄거리.
프랑스 여자는 '느베르'에서 왔고, 일본 남자는 '히로시마'에서 왔다.
그들은 지금 30대이고 종전되던 45년에는 각각 스무살과 스물 두살이었다.

이틀간의 영화 속 시간은 플래시백을 통해 14년 동안의 상처를 살려낸다. 45년부터 59년까지.
원폭을 맞은 일본인들의 비참하게 부풀어 오른 살갗을 정사하는 남녀의 살에 덧씌워 시작하는 영화는
전반부에 전후 일본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보여준다. 파괴돼버린 도시를 보여준다.
끔찍하고 끔찍해 죄의식이 느껴진다.

그때 한국인으로서 이중적인 감정이 고개를 든다. 저항감.
무고한 원폭 피해자 일본인들을 보여주는 화면에 100% 빠져들 수 없는 거리감.
원폭이 투하된 후에야 제국주의의 수탈을 포기하고 패망을 선언하는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서 원폭의 순간을 극화해 묘사한 것을 보며 '피해자 정서'에 거부감을 느꼈던 기억도 올라온다.
하지만 원폭의 상흔이 영상으로 나열될 때 '그동안 정말 몰랐구나'라는 반성도 함께 하면서 복잡한 기분이 된다.

지배자(아시아를 침략한 히로히토)와 소시민(원폭 피해자들인 일본인 대중),
역사의 소용돌이(2차 대전)와 평범한 사람들(사랑하던 독일군 남성과 프랑스인 여성).

영화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하게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원폭피해자들과 '그녀'를 통해 보여준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롱테이크' 내지 '팬'으로, 후자는 '클로즈업'으로.

그녀는 18살 때 23살인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고,
독일군 병사는 2차 대전의 추축국이자 적군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러 오다 총을 맞아 죽었다.
그들은 금지된 사랑을 하느라 헛간, 지하실에서 사랑을 나눴고,
죽어서야 길로 나오게 된다.(길에서 총에 맞았고, 길에서 죽어갔다.)
충격적인 첫사랑의 죽음으로 그녀의 시간은 멈춘다.
죽어가는 첫사랑의 몸 위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미쳐버린 그녀는 지하실에 감금되고,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그리고 야반도주 하듯이 파리로 떠나 '느베르 시대'를 잊는다. 생존을 위해.

하지만 실상은
"망각에의 저항"
그녀는 상처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14년을 살아왔다.
첫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영화는 도시를 인물화한다.
첫사랑 독일군 병사와 '바이에른'으로 가려 했던 그녀는 14년이 지난 후에야 상처를 마주하고
바이에른의 분신인 '히로시마'에 정착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바이에른=첫사랑, 히로시마=그)

독일군 병사와 고향 '느베르'에서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느베르' 자체가 된다.
첫사랑의 죽음과 함께 '망각'의 굴 속으로 들어가야만 살 수 있었던 14년을 그제서야 '말'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다시 전쟁이 나야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라며 애써 헤어지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결국,

"당신은 느베르, 나는 히로시마" 라는 말을 받아들이며

다른 단계로 이동한다. 꽁꽁 숨겨놨던 생채기를 드러낸 후 붕대를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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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년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된 촬영과 화질을 보고 놀랐다.
역사의 상흔과 개인의 상처를 병렬, 심화. 대비, 승화시키는 흐름이 참 정교하다고 느꼈다.
영화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대사와 구성..책을 읽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깊이가 있었다는 뜻.

시네마떼끄 서울아트시네마 감사합니다.
뒤라스, 알랭 레네, 배우들에게도 감사합니다.
by 비올 | 2008/11/02 02:58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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